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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의 태동과 역사, 세계YMCA와 한국YMCA

 YMCA의 태동

18세기 반부터 19세기의 중반에 걸쳐,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과 그 후의 자본주의의 발달은 대량의 임금 노동자를 낳아, 사람들의 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YMCA창립자의 한 명인 죠지 윌리암스(1821~1905)는 영국 남부의 농원에서 14세에 도시로 나와 종형제로서 히치콕로저스라는 상점에서 포목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 무렵의 포목상 점원의 노동조건은 노동시간이 1일 평균 14시간, 주 6일 근무라는 가혹한 것 이였다. 많은 동료들이 근무시간 후에 과음 및 부도덕한 것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봐 온 죠지는 극도의 피곤은 사람의 마음,정신을 약하게 만드는 것을 통감했다. 죠지는 사람이 스스로의 체력으로 내면으로부터 환경을 좋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신중하게 생각해, 그리스도로의 신앙에 의한 사랑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도달하였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며,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가게를 중심으로 기도의 그룹을 만들었다. 그것이 1844년 6월 6일, YMCA의 결성으로 연결되었고 런던YMCA에서 출발하여 전세계로 확산되었으며, 1855년 세계YMCA연맹이 결성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오랜 평신도의 범세계적 운동체로 발전해 왔다.

 조오지 윌리암스 George Williams

조오지 윌리암스


YMCA 창시자 (죠지  윌리암스) 는 지위가 높은 사람도, 훌륭한 지식인도 아니었다. 평범한 포목상의  점원으로 일을 했다.  그가  1894년  탁월한  그리스도인으로  세계에 큰 공적을 남겼다.  빅토리아 여왕으로 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았던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과 3 가지 약속을 하였고, 그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 되었다.

  1> 잠을 깨우는 시계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여 그 소리가 끝나기 전에 침대에서 일어날것.
  2> 날마다 아침에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할것.
  3> 그날 해야 할 일은 반드시 그날 안에 할것.  이었다. 

Sir George Williams (October 11, 1821-1905), was the founder of the YMCA.

Williams was born on a farm in Dulverton, Somerset, England. As a young man, he described himself as a "careless, thoughtless, godless, swearing young fellow," but eventually became a devout Christian.

He went to London and worked in a draper's shop. Appalled by the terrible conditions in London for young working men, he gathered a group of his fellow drapers together to create a place that wouldn't tempt young men into sin. That place was the YMCA.

Williams was knighted in 1894 by Queen Victoria. After his death in 1905, he was commemorated by a stained-glass window in the nave of Westminster Abbey. Sir George Williams is buried in St. Paul's Cathedral.

 

 초교파 활동

YMCA는 영혼의 구제에 의한 사회적 개혁을 목표로 하는 12명의 청년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그들은 각각 4개의 다른 교파에 속하는 그리스도교 신도였다. 장로교에 속하는 3명, 침례파에 속하는 3명, 감리교에 속하는 3명, 그리고 영국교회(성공회)에 속하는 3명이었다.


YMCA는 당초부터 교파의 차이를 도외시하는 한편 그리스도교뿐만 아닌 일반의 청년도 참여할 수 있는 운동으로서 급속히 발전했다. YMCA는 탄생한 당초부터 초교파의 사람들의 모임이며, 이것은 YMCA의 기본적 성격이 되고 있다.

현재는 WCC(세계교회협의회)、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및 WSCF(세계학생그리스도교연맹) 등 에큐메니칼 운동의 사명과 성격을 가진 단체,기관 모두와 협동하여, 크리스챤 리더쉽의 육성에 노력하고 있다. YMCA는 그리스도교를 지침으로 하면서, 사회의 제과제에 임하는 NGO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인권을 소중히 하는 것, 하나님이 만든 세계를 소중히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YMCA는 세계 120 여개국에 12,000 여개의 조직을 가진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총본산으로서 기독교 민간단체로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오늘날에도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세계YMCA 역사


1. 형성기 : 1844년 (런던YMCA 창설) - 1878년

YMCA운동의 발단은 1844년 6월 6일 죠오지 윌리암스(George Williams)를 비롯한 12명의 젊은이들에 의해 창설된 런던YMCA에 있다.
이들은 산업혁명 직후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젊은이들의 정신적,영적상태의 개선을 도모하는 하나의 협회를 만들었는데, 이 운동이 구미각국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1855년에는 파리에서 제1차 YMCA 세계 대회를 개최하고, YMCA의 근본원리가 되는 파리기준을 채택하였으며, 세계YMCA연맹(The World Alliance of YMCAs)이 결성되었다.
YMCA운동의 정신적인 근원은 독일 스페너 목사의 경건주의에 의한 영적, 정신적 각성에 있으며, 만인사제론에 입각한 평신도성의 자각, 선교에의 정열과 기독교 일치 운동에의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2. 확장기 : 1878년 (제네바대회) - 1913년

유럽으로부터 북미주지역으로 확산된 YMCA는 1878년의 제네바 세계대회에서 세계YMCA연맹 이사회를 설치한 이래 전세계적으로 운동의 확장을 이루었다. 또한 YMCA는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총본산으로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파리기준의 근본원리는 19 -20세기의 모든 에큐메니칼 운동체의 고전적 원칙이 되었다.
세계학생기독교연맹(WSCF), 국제선교협의회(IMC) 및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모두 죤 알 모트(J.R.Mott)를 비롯한 YMCA지도자들의 직접적인 지도력과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으며, 세계 적십자사도 YMCA의 초창기 지도자였던 앙리 듀낭(Henri Dunant)에 의해 1876년에 창설되었다.


3. 시련기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 1954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루면서 세계YMCA는 형언키 어려운 시련을 겪으면서도 놀라운 봉사의 저력을 발휘, 전쟁포로를 위한 사업과 난민구호사업 등을 펼쳤다.


4. 주체성 재확립기 : 1955년 (파리 100년제) - 현재

1955년의 파리 100년제를 계기로 세계YMCA는 주체성 재확립을 위해 파리기준을 재확인하는 등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1973년 우간다의 캄팔라 세계대회에서는 캄팔라 원칙을 채택하고, YMCA의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더 큰 사회적 책임과 관심을 강조하게 된다.
160년의 오랜 역사를 가진 세계YMCA운동은 이 시기에 제3세계 나라들로 확장되어 현재 세계 120여개국에 12,000 여개의 조직과 3천만여명의 회원 및 66만명의 지도자와 2만명의 전문사역자를 가진 세계 최대의 기독교민간 운동체로 발전하였다.

 한국YMCA

개화기에 출범한 한국YMCA는 101년의 역사 속에서 한국의 근대화에 많은 공헌을 했다. 한국YMCA는 민족 독립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새로운 교육과 문화활동을 소개하는 한편 농촌사업 등을 통해 민중의 복지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다.

한국YMCA는 일제 말기의 수난기와 해방직후의 혼란기를 거쳐 운동을 재건,자립체제를 구축하고 1976년에는 한국YMCA목적문을 제정하여 운동의 이념을 새롭게 정립하였다.


현재 전국 62개 도시에 10만여 회원과 약 2,000 여명의 실무진을 가진 한국YMCA는 사회 개발과 함께 민주적인 국가 발전과 평화적 통일을 위한 시민운동의 전개를 결의하고 이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YMCA 역사

1. 태동기의 몸짓 - 창설기의 YMCA (1895 - 1914)

한국YMCA의 창설은 선각적 지사들과 청년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서재필, 윤치호 등이 중심이 된 독립협회운동과 1899년 한국청년 150명의 기독교청년회(YMCA) 설립청원운동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1896년 11월 최초의 학생YMCA로 배재학당에 협성회가 조직되고, 이 조직이 학숙청년회가 되었다가 후에 학생YMCA로 발전되고 1899년 150명의 기독교 청년들이 YMCA 탄생을 위해서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라 언더우드에 의해 북미YMCA 국제위원회에 간사 파견을 요청하고 드디어 북미 YMCA 국제위원회에서 질레트를 간사로 파견하여, 1903년 10월 28일 수요일 오후 8시 최초의 한국YMCA로 황성기독교청년회가 (지금의 서울YMCA) 창립되면서 역사의 표면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초대 이사장 게일, 초대총무 질레트, 정회원 28명, 준회원 9명)
이후 한국YMCA는 이상재, 윤치호,김정식, 남궁억 등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상동교회의 진덕기를 비롯한 평민출신의 청년 애국지사들이 가담하면서 교육 계몽과 선교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하령회를 비롯한 활발한 학생사업을 통해 새로운 민족지도력의 베출구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1911년 테라우찌총독 암살모의사건(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YMCA와 신민회 등 기독교민족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하였다.


2.연합회의 창립과 운동의 기틀을 다지며:1914년(전국연합회 결성)- 1923년

105인 사건과 유신회 사건 등 잇달은 일제의 탄압으로 윤치호, 김규식, 이승만 등 주요 지도력들이 투옥, 망명, 추방당하는 속에서도 한국YMCA는 1914년 4월 개성 한영서원에서 1개 시청년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 - 조선중앙기독교 청년회로 강제개명)와 9개 학생Y 대표 45명이 모인 가운데 전국조직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3.1운동의 과정에서도 YMCA는 그 가교의 역할을 다하였다. 1919년 2월 8일 동경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 회관에서 일본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발표하였으며, 이것이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고, 독립선언의 33인 민족지도자 가운데 9인이 YMCA를 통해 배출되었다.


3.1운동 이후 연합회는 새로이 시청년회의 조직에 힘써 평양YMCA(초대총무 조만식), 광주YMCA, 대구YMCA가 창립되는 한 편으로, YMCA 기간사업의 하나인 학생사업을 조직적으로 지도해 나가기 위해 1921년 학생부를 설치하고, 1921년 3월부터는 새로운 사회사상과 기독교사상을 소개하는 월간 종합지로 [청년]을 발행하였다.


3. 민족의 살길을 찾아서 : 1923년 - 1938년

1923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로 독립한 한국YMCA는 세계연맹에 단독으로 가입하여 활발한 국제활동을 통해 민족운동의 국제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편으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 기성운동 등 1920년대 전반 국내 민족운동 - 실력양성운동의 과정 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0년대 중반이래 YMCA 사회운동 가운데 가장 특기할만한 부분은 농촌사업의 대대적인 전개(물산 장려운동 등)였다.
1925년 연합회에 농촌부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된 YMCA 농촌사업은 정신의 소생, 생활의 조직, 농사개량을 3대 강령으로 삼고, 도시중심 봉사중심의 서구적 YMCA의 모델에서 벗어나 전국민의 80% 이상이 살고 있는 농촌에 운동의 뿌리를 내리는 것을 목표로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그 결과 YMCA 농촌사업은 1929년 현재 YMCA 촌락 227개, 야학생 10,507, 협동조합 22개, 농민회 82개, 회원 4,128명, 그리고 전국 19개 도시의 농민학교 설립 등 다대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또한 연합회는 농촌사업의 효율적 전개를 위해 1928년 전국을 중앙, 관서, 관북, 호남, 영남 등 5개의 지방부로 나누고 각기 간사를 배치함으로써 도시Y, 학생Y, 농촌Y를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지역적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YMCA는 교파를 초월한 평신도운동체로서 이시기 한국 에큐메니칼운동을 주도해 나갔으며,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의 협동전선으로 신간회(회장:이상재, 중앙청년회관에서 결성)가 출범하는 과정에서도 좌우합작과 지역차원 사회운동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일제의 탄압이 한층 드세어지는 가운데 한국YMCA는 1935년 적극신앙단 사건과 내부의 지도노선 갈등으로 신흥우 총무가 사임한데 이어, 연합회의 기간부서인 학생부와 지방부가 폐지되고, 농촌부 역시 유명무실해지는 등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기에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일어나 YMCA 지 도력들이 대거 검거됨으로써 연합회의 활동은 거의 중단상태에 놓이게 되었으며, 1938년 8월 급기야 일본기독교청년회 조선연합회로 개편되는 굴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4. 전통의 단절과 재건의 굽잇길 : 1945년 - 1970년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한국YMCA는 일제 말기의 극심한 탄압으로 지도력과 조직력이 고갈된 상황 에서도 재건을 위한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1938년 이래 중단상태에 있던 남녀학생 하령회가 다시 시작되었고, 연합회 기관지로 [청년]이 복간되었으며,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3년 대회가 1948년부터 재개되었다.


6.25전쟁으로 한국YMCA는 연합회 회장 양주삼, 증경 총무 구자옥 등 다수의 지도력들이 납북되고 종로의 서울Y 회관 건물이 전소되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이같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부산 피난 기간 중인 1952년 1월 연합회는 'YMCA전문학원'을 개설하여 체계적인 간사지도력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각지의 YMCA들은 재정과 역량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궁핍과 사회적 부조리로 인한 시대의 짐을 나누어지려는 전후복지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전개하였다.


학생Y 역시 해방후 자생적으로 일어난 기독학생운동을 기반으로 하여 1952년 18개 대학 30개 고등학교의학생Y들로 '학생Y 전국연맹'과 '하이Y 전국연맹'을 결성함으로써 재건의 열매를 맺기에 이르렀다. 이후 Y학생운동은 기독학생회전국연합회(KSCF)와 함께 통일된 한국학생기독교운동을 위한 본격적 발족으로 한국학생기독교운동협의회(KSCC)를 조직하였다.


학생Y의 재건외에도 'YMCA전문학원'에서 훈련을 받은 전문사역자들에 의해 '소년사업'(하이Y, 중학Y, 어린이Y)이 활발히 전개되어 전국의 거의 모든 시청년회에서 주요 목적사업으로 발전하였다. 1960년 4월혁명을 경험하면서 YMCA는 내적인 비판과 혁신의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에 한국YMCA는 기사회생의 노력으로 1962년 "3개년 전진운동"을 시도했으나, 재정자립 문제와 군사독재의 등장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5. 새로운 전환점을 찾아서 :1970년 -

7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YMCA는 운동성회복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신학적, 기구적 각성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군사독재와 급속한 산업화, 에큐메니칼 운동 차원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개발과 정의'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기독교 주체성에 대한 YMCA내의 위기의식 고조 등 안팎의 여러 요인들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대한YMCA연맹은 1969년 제 20차 전국대회를 계기로 사회개발사업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사업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1971년 제 21차 전국대회의 결의로 설치된 '사회개발특별위원회'는 '시민의식 개발' '지역사회 조직''직업기술교육' 등으로 세부사업계획안을 작성하고, 전국적 규모로 이를 실천에 옮겨 나갔다.


이들 사업은 1973년까지 활발히 진행된 후 70년대 중반부터 연맹에 의해 새롭게 착수된 농촌사업에 수렴되었다.
연맹주도하의 농촌사업은1)농민자신의 이익을 기초로 농민자신의 조직을 확대하는 일2)농민을 의식화하고 그들을 한데 묶을 수 있도록 농민을 교육하는 일을 과제로 삼아1974년부터 16년동안 3단계에 걸쳐 전개되었다.


한편, 전세계적으로 YMCA의 정체성에 대한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YMCA는 1974년 '목적과 사업연구위원회'를 신설하여 한국YMCA운동의 '신학적 반성과 그 존재이유를 재규정'하는 이른바 'YMCA이념추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인식에 기초하여 한국YMCA는 1976년 제23차 전국대회에서 [한국YMCA목적문]을 제정함으로써, 1973년 캄팔라원칙 수립 이후 자기 목적문을 가진 세계 최초의 기독청년회가 되었다.


지도력 양성 및 운동담지체 형성과 관련하여 한국YMCA는 간사자격규정과 교육과정을 한층 더 엄격히 하여 수행하는 한편, 1969년 통합 KSCF로 이관되어진 대학Y를 대신하여 YMCA운동성과 청년성을 담보하는 운동담지체로서 청년Y를 조직하는데 주력하였다.


청년Y는 1973년 6월 제1회 청년Y 클럽 전국대회를 개최한 이래 성장을 거듭하여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전국대회 참가인원이 천명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며, 현재는 해당 시청년회의 핵심 행동세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70년대 이래 YMCA의 새로운 전환의 노력을 통해 가장 두각을 보인 부문은 민주시민운동이었다. 군사독재 하에서 통제된 언론이 담아내지 못하던 시민들의 민주여론을 수렴해 나감으로써, 시민의 의견을 여론화함과 동시에 민주적인 시민의 훈련에 기여한 YMCA 시민논단을 비롯하여, 부당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권익옹호 차원에서 시작하여 포괄적인 시민주권운동으로 발전해 나간 시민중계실 사업, 그리고 외채, 교육, 공정선거, 양담배,수입농산물,향락문화, 물가, 환경, 청소년문제 등 시민사회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고 이를 정책화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전국규모로 전개된 시민자구운동은 모두 1980년대에 이르러 전국 주요 도시 YMCA의 목적사업으로 확산되어 나갔으며, 시민여론의 커다란 호응은 물론 시민운동체로서 YMCA의 존재를 시민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6. 21세기를 맞으며

한국YMCA의 역사는 사명을 위한 긍정(Affirmation)의 역사라기 보다는 사명을 위한 부정(Negation)의 역사였다.
분단과 독재와 비인간화로 얼룩진 지난 반세기의 역사 속에서도 한국YMCA의 부정을 통한 긍정 도출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특히 70년대 중반 이래의 전환의 노력을 통해 한국YMCA는 자츰 자기이해의 자리에서 공헌의 자리로, 옮겨 앉으면서 국제적 차원에서도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제 전국에는 60여개의 도시YMCA가 설립되어 있다. 그러나 이같은 기구확장과 살림의 정착이 한국YMCA의 궁극목적은 아니다.


21세기를 맞으며 한국YMCA에게는 내부적인 연대와 나눔을 재정, 프로그램, 이념의 추구와 발전의 제 측면에서 한층 더 강화하는 일, 우수한 유자격 전문지도력을 확보하고 양성하는 일, 개방화와 국제화의 추세 속에서 한국YMCA의 주체성을 명확히 정립하고 그 사명을 다하는 일, 민족의 염원이며 과제인 평화통일운동의 과정에서 제 몫을 담당하는 일, 세계YMCA에 창조적으로 참여하며 공헌해 가는 과제가 놓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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